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방식도 다변화되었습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나 데이트 사이트를 통해 새로운 인연을 맺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지만, 이러한 익명성과 비대면성을 악용한 신종 범죄 또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최근 홍콩에서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온라인 연인에게 무려 8년 동안 20억 원이라는 거액을 송금한 여성의 충격적인 사연이 알려지며 전 세계적으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치밀하게 설계된 감정의 덫, ‘로맨스 스캠(Romance Scam)’의 무서운 실체와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8년의 맹목적인 믿음, 로맨스 스캠의 덫에 빠진 금융인
홍콩의 유력 매체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최근 온라인 로맨스 사기에 당한 40대 여성 A씨의 안타까운 사연을 대서특필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피해자 A씨가 평소 숫자와 돈의 흐름에 밝아야 하는 홍콩의 한 금융회사 소속 엘리트 직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로맨스 스캠이 직업이나 지적 수준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교묘한 심리 범죄임을 시사합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A씨는 한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를 통해 남성 B씨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B씨는 자신을 “영국에 거주하는 백인이자 전도유망한 영화감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는 메시지를 주고받는 내내 재치 있는 입담과 젠틀한 매너를 과시했고, A씨는 바쁜 일상 속에서 자신에게 따뜻한 위로와 관심을 건네는 B씨에게 금세 깊은 호감과 연애 감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200번의 송금과 20억 원의 피해: 치밀하고 교묘한 수법
두 사람의 온라인 교제가 시작된 지 약 3개월이 지났을 무렵, B씨의 본색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영화 제작 문제로 급하게 자금이 필요하다”며 A씨에게 1만 홍콩달러(한화 약 140만 원)를 요구했습니다. 이미 그에게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던 A씨는 아무런 의심 없이 흔쾌히 돈을 송금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끝이 아닌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B씨는 이후에도 사고 처리, 세금 문제, 사업 자금 등 온갖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끊임없이 금전을 요구했습니다. A씨는 사랑하는 연인을 돕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신이 수년간 모아둔 적금을 해지하는 것은 물론, 가족과 주변 친구들에게까지 돈을 빌려 B씨의 계좌로 송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무려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A씨가 B씨에게 건넨 돈은 총 1,400만 홍콩달러, 한화로 약 20억 원에 달했으며 송금 횟수만 200번을 훌쩍 넘겼습니다.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주변의 의심과 뒤늦은 후회
이 사건이 더욱 충격적인 이유는 8년이라는 긴 교제 기간 동안 A씨가 B씨의 얼굴을 실제로 대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B씨는 영상 통화를 교묘하게 피하거나 만남을 약속해 놓고 직전에 취소하는 등 전형적인 사기꾼의 패턴을 보였습니다.
끝없이 돈을 빌리러 다니는 A씨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지인들이 결국 발 벗고 나섰습니다. “8년이나 사귀었는데 얼굴 한 번 안 보여주는 영국 남자는 백프로 사기꾼이다”라는 주변의 강한 만류와 추궁이 이어지자, 그제야 A씨는 자신이 거대한 사기극의 피해자가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A씨는 경찰에 B씨를 정식으로 고소했습니다.
수사에 착수한 홍콩 경찰의 발표는 참담했습니다. 영국인 영화감독이라던 B씨의 이름과 직업, 신분은 모두 가짜였으며 철저하게 조작된 허구의 인물이었습니다. 경찰은 현재 사기 범죄에 사용된 은행 계좌와 자금 흐름을 토대로 범인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홍콩 경찰청 관계자는 “온라인을 통해 만난 사람과 데이트를 할 때는 상대방의 신원을 교차 검증해야 하며, 금전을 요구할 경우 즉시 대화를 중단하고 수사 기관에 신고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당부했습니다.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가장 약한 감정을 파고드는 로맨스 스캠,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가 주의해야 할 범죄입니다.


